제목: 고양이의 죽음
봄빛
늦은 밤, 학원 마친 큰 아이를 데리러 갔다가 오는 길이었다. 함께 배드민턴 운동하고 오느라 집사람도 조수석에 앉아 있다. 차들이 많지 않은 도로인데, 멀리 앞 차 불빛에 팔랑팔랑 신문지가 바람타고 있는 것이 보인다. 2대의 차가 1차선을 지나치고, 나는 천천히 간다고 가던 2차선에 차를 세워버렸다.
고양이가 고통 속에 버둥거리며 비명을 지르고 있었던거다. 뒤차를 천천히 오라고 손으로 신호를 보내며, 고양이가 잠시 멈춘 새 목덜미를 잡고 인도에 데려 놓았다. 두고 오는 뒤로 격렬한 고통의 소리가 들린다. 버둥거리는 것도 멈춘 듯하다.
집사람과 잠시 고양이의 죽음에 애도를 표하고 집으로 왔다.
이제 이태가 지났나보다. 할머니는 고향에서 홀로 오래 지내셨다. 거동이 심상찮고 숨쉬기도 힘든 시점에 여기, 요양병원으로 오셔서 6개월을 보내신 후 돌아가셨다.
일주일에 한번, 장손이라고 애지중지 하시던 기억은 저 멀리 밀치고 병원 방문이 점점 힘들어 질 무렵이었다. 할머니는 내 손을 꼭 잡고 한참을 계셨다. 몸은 말라있었다. 잡고 있는 손은 뼈마디가 느껴진다. 며칠 후 큰 눈이 온 토요일에 장례식을 했다.
죽는다는 것은 누구나 피해 갈 수 없는 것이다. 죽음을 어찌 보아야 할까?
새삼스럽게도 우리 몸은 신비하다. 물질로 이루어진 것에 정신이 깃든 것이잖은가? 세포가 자기 복제를 하고, 우리가 먹는 음식이 다시 몸을 이루는 부분이 된다. 몸을 이루는 것은 위와 장과 같은 내부 장기들의 공으로 기계적으로 이루어진다고 보면, 정신은 어디에서 생긴 것일까?
소위, 뇌과학이 인기인데, 뉴런과 뉴런의 연결매개를 여러 이온들이 한다. 그러면서 어떤 인지작용에 대한 대응을 하며 개체화되어 인식작용이 생긴다. 그리고, 생각이 나타난다. 어차피, 피동적일 수 밖에 없는 생성과정이라 환경에 적응하고 대응하기 위한 것일 것이다.
그런 생각들이 나일까? 나는 누구인가?
카뮈의 ‘이방인’에 보면,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주인공의 대응이 끝내 그를 죽음으로 내몬다. 죽음은 슬픈 것인가?
내가 죽을수 있다는 것을 他者의 죽음을 통해 확인하기 때문에 슬픈 것일까? 내가 가진 그와의 추억이, 기억이, 단지, 사랑한다고 더 하지 못했던 것이 미안해서 슬픈 것일까? 다시 어루만질수 없는 그 손이 기억날까봐 두려워 하는 것인가?
살아있어 아름다운 것이, 없어지기 때문에 슬픈 것이다. 그 아름다움은 단지, 그만이 가졌던 것이기에.
그 고양이는 나의 고양이가 아니었구나!
나만이 가진 그의 아름다움이 없었기에 남 보듯, 물건 보듯 했구나. 바쁘다는 핑계에다 말이다.
아침에 그 앞을 차로 지나면서 고양이의 주검이 그 자리에 누워 있는 것을 본다. 저녁 퇴근 시간에 어느 곳이라도 묻어줘야겠다.
(사진출처 : 네이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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