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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울산 톺아보기 - 일제시대 울산의 도시공간구조

2012년 12월 울산발전연구원에서 울산학연구논총 "울산학 연구 제7호" 을 발간했는데요,

그중 김헌규 울산대 건축대학 교수께서 작성·게재한 논문을 발췌 수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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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에서 나서 지금까지 자란 세월을 보니 만만치 않은 시간이 흘렀네요.

 

하지만, 정작 여기서 살고 있는 저는 울산이 어떤 곳이었는지 잘 모릅니다. 누구나 그러할 지 모르겠네요. 그 시간만 그리고 살고 있는 그 지역만 알지요. 지나고 나서 보면 그것이 우리의 역사고 울산의 역사이고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알려줄 수도 있는 그러한 자료였는데요.

 

요즘은 한번씩 자전거타고 돌아다니며 찍은 사진들을 정리하며, 예전 모습과 급격히 변해가는 살아있는 도시로서 울산을 느낀답니다.

 

이런때에 눈에 쏙~ 띄는 자료가 보입니다.

 

작년(2012년) 겨울에 발간된 '울산학 연구'인데요.

 

우선 일제시대부터 80년대 이후까지 4개의 단락으로 나누어 있네요.

 

오늘은 일제시대 울산은 어떤 곳이었는지 한번 알아보려 합니다.

 

(이후 논문 내용 중 발췌기재)

  

<1만분의 1 조선지형도 울산(1917년 측도)>

 

  1962년 공업센터로 지정되기 이전의 울산의 공간구조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1914년 측도, 1918년 발행된 '5만분의 1 조선지형도 울산'과 1917년에 측도되어 1918년 발행된 '1만분의 1 조선지형도 울산' 일 것이다. '1만분의 1 조선지형도 울산'은 한장의 지도로 이루어져 있어 지도이외의 범위에 대한 상황은 파악할 수 없으나, '5만분의 1 조선지형도 울산'의 경우 당시 전국을 대상으로 거의 모든 지역이 제작되었기 때문에 울산의 중심지역 뿐만 아니라 주변 지역의 상황까지도 파악할 수 있다.

  이들 지도를 이용하여 당시의 상황을 살펴보면 우선 건축물이 밀집되어 시가지를 이루고 있는 것이 확인되는 것은 과거 울산읍성이 있었던 울산읍치 지역과 경상좌도병마절도사영이 있었던 병영성 지역뿐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위 그림 참고)

 

  이 시기 울산의 인구규모를 살펴보면 울산군 전체의 인구는 124,343명이었으며, 이 중 인구가 가장 많았던 면은 울산읍치가 위치하였던 부내면으로 11,034명이었으며, 병영성이 위치한 하상면이 9,241명으로 울산군에서 두 번째로 인구가 많은 지역이었다. 울산군에서 세 번째로 인구가 많았던 동면(7,684명)인데 지금의 방어진 쪽으로 방어진항 등 일부 항구지역의 해안가에 약간의 시가지가 확인될 뿐 두군데 시가지와 같은 규모의 시가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5만분의 1 조선지형도 울산, 장생포(도로 그림추가)>

 

  울산읍의 경우 동서축이 발달되어 있어 병영과 연계된 시가지를 구축하고 있고 도로망도 병영에서 경주쪽으로 가는 방향과 부산, 언양 방향의 도로가 주된 기능을 하였으며, 장생포가 인구가 세번째로 많이 살던 방어진보다 도로가 잘 연결되어 있어 울산읍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음을 알수 있다.

 

  이상과 같은 1910년대의 울산지역 지도 등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일제시대 초기까지의 울산지역은 경상좌도의 해안지역을 방어하는 군사적 거점으로서의 병영성을 제외하고는 다른 지역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경상도의 작은 읍치였다. 그러한 울산의 위상이 급변하게 된 계기는 1940년 무렵 일본인 이케다 스케타다에 의해 추진된 공업도시계획에서부터였다. 이케다는 울산의 역사적 특성은 물론 지형조건에 따른 입지적 특성까지 심도 있게 분석하여 울산이 '대일본제국' 을 위한 "병참기지"로서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음을 역설하였다.

 

<울산도시계획평면도(1943년경) - 울산대학교 한삼건 교수 제공>

  그는 1929년 부산남항 축항 공사 등을 시작으로 하여 1936년에는 조선축항주식회사를 설립하고, 1937년부터 울산항 축항 및 인구 50만 공업도시 계획을 수립하였다. 이후 1943년 5월에 울산 학성공원에서 울산공업도시 개발을 위한 기공식을 거행하였다.

  이케다의 계획을 살펴보면 지금의 양정동에서 명촌동까지 공업지역(제2기 공업지조성지역-노란부분)으로 계획되어 있으며 그 외곽에 약간의 주거지가 계획되어 있다. 제2기공업지조성지역의 북쪽 즉 지금의 효문동 및 진장동 지역과 태화강 남쪽의 삼산본동지역은 시가지예정지역으로 비워두었다. 이 계획이 가지는 특징 중 하나로써 기존 시가지 즉 병영성과 울산읍치를 연결하는 철도를 기준으로 동쪽만을 개발 대상지로 삼고 있는 점이 눈에 띈다. 특히 기존 시가지와 계획지 간의 도로조차도 거의 연결되지 않고 있다는 점은 그만큼 기존 시가지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이케다의 노력과는 별개로 울산에는 조선총독부에 의해 원산에 설립되어 있던 조선석유주식회사의 일부 시설의 이전이 추진되었다. 당시 건설을 이끌었던 것은 동양척식주식회사로 1940년경부터 고사동 일대의 공장부지 매입을 추진하여 1944년에 약 15만평의 공장부지를 확보하였다. 여기에 매년 20만톤의 정유능력을 갖춘 울산공장 건설에 착공하여 공사를 진행하였으나 공정의 약 70%가 진행된 단계에 일본의 패전으로 건설이 중단되었다고 한다. 이 공장이 건설되면서 석유수송을 위한 철도선이 계획되고 장생포역이 신설되었다. 뿐만 아니라 장생포항에는 유류비축을 위한 축항공사 및 매립공사가 진행되었다.

  그런데 위 <울산도시계획평면도>를 살펴보면 울산읍치, 병영성 그리고 방어진항이 시가지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러한 당시의 상황은 인구분포에서도 어느 정도 확인된다. 위<표 1>은 일제시대 울산지역의 면별 인구규모를 나타낸 것이다. 1917년 당시 인구가 가장 많았던 울산면은 1945년까지 약 7천명의 인구가 증가하였던 것으로 나타났다. 다음으로 방어진항이 있었던 동면은 1930년 이미 인구가 약2배 가까운 증가를 보이고 있어 어항기능의 정착으로 인하여 급격히 발전하고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거기에 비해 장생포항이 속해있던 대현면의 경우도 방어진만큼은 아니지만 꾸준하면서도 비교적 큰 폭으로 인구가 증가하고 있었다.

  이외의 지역들의 경우 일제시대를 지나면서 인구규모에 큰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다만 당시 주요 지역들의 대부분은 인구가 증가 혹은 유지되고 있었던데 비해 병영성이 있었던 하상면의 경우 1930년대 이후 인구가 눈에 띄게 감소하고 있는 것이 확인된다. 이는 앞서도 언급하였지만 병영성이 가지고 있었던 주요 도시기능인 군사기능이 사라지고 난 이후 시가지로서의 인구집중력이 약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변화는 병영성 내 대지면정이 줄어들고 농경지가 늘어나는 등의 변화로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 확인된 바 있다.

  이처럼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울산의 도시기능은 울산읍치 즉 울산면에 집중되면서 조선시대까지 중요한 시가지로 기능해 왔던 군사도시 병영성은 도시적 기능이 사라지면서 도시로서의 역할도 약해지고 있었다. 그에 비해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새로운 시가지로써 방어진 지역이 인구규모 면에서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는 조선시대까지 그다지 활발하지 않았던 어업기능이 새로운 경제활동으로 자리 잡으면서 생겨난 변화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변화가 공간구조적 측면에서는 변화를 유발하고 있지는 않았다는 점이 눈에 띈다. 즉 방어진이 새로운 시가지로 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울산의 중심지인 울산면 지역과 연결하기 위한 도로의 정비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는 도시시스템적 측면에서 이들 지역이 서로 네트워크를 이루지 않고 각자 독립적으로 성장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판단된다.

 

  자료를 읽어면서 받은 느낌은

와..! 벌써 이전부터 울산의 개발계획이 되어 있었구나.. 하는 그런 것과 반구대 암각화에 그려져 있는 고래 그림처럼 고래를 잡던 곳인 울산에 오랜시간이 지나서도 다시 고래잡이 전진기지가 들어서는 걸 보면서 시간이 지나도 이 지역의 가치는 변화하지 않는구나하고 느낍니다. 그러한 가치들이 내재해 있는 곳인거지요. 

 

  정유공장을 보면 재작년인가 일본 규슈지역을 가게 되었는데, ENEOS 정유공장을 가보고 알게 된 것인데, 그곳이 조수간만의 차가 적고 태풍 등 외부적 환경요건에 피해를 덜받는 곳으로 이전부터 알려져 있던 곳이었더군요.

  울산도 그런것 같아요. 전국에서 가장 조수간만의 차와 일교차가 적고, 태풍이 오다가도 비껴가는 걸 보면서 알게되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