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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울산톺아보기> 도시로서의 새로운 출발(1960년대)

오늘은 울산의 도시 역사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이라고 할수 있는 울산특정공업지구 결정과 그 시절 울산의 도시 발전상입니다.

 

- 울산발전연구원에서 2012년 12월 발간한 울산학연구 제7호 내용중

김헌규 울산대학교 건축대학 교수의 글에서 펌 -

 

울산은 저번 글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지정학적으로 조수간만의 차가 적고, 연중온도 변화가 전국에서 가장 적은 도시인데요. 게다가 1950년 한국전쟁에서도 직접적인 피해를 거의 입지않아 도시공간적으로 큰 변화가 없었습니다.

작은면이었던 울산이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된 순간이 바로 1962년 1월에 결의된 울산공업센터 설치입니다. 1962년 1월 13일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발표한 다음 1월 27일 울산을 특정공업지구로 결정 · 공표하고, 1주일 뒤인 2월3일 울산공업센터 기공식이 대현면 매암리에서 거행되었습니다. 이와 동시에 공장건설과 지원시설에 대한 조사 및 계획에 착수하였군요.

이후 3월에 울산개발위원회 개발계획본부 및 울산특별건설국이 설치되고, 그해 5월 14일 울산최초의 도시계획이 국토건설청 고시 제149호로 결정되었습니다. 이 계획에 따르면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일환으로서 계획인구 50만의 문화공업도시를 건설함과 동시에 관광시설도 완비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네요. 도시계획구역 176,040,000㎡ 내의 인구는 40만명, 교외 10만 명으로 계획되었습니다.

이 계획에 따르면 지금의 삼산동 일대에 격자형의 가로망이 갖추어진 중심시가지가 입지하고 있으며, 장생포를 포함한 대현면 일대와 강북의 양정동 일대 등이 공업지역으로 계획되었습니다. 공업지역과 시가지 사이, 신시가지의 상업지와 주거지역 사이에는 폭 200~300m의 띠모양으로 이루어진 녹지대가 계획되어 있었습니다. 본 계획의 가장 중심지역인 신시가지는 중심에는 주거지(초록색)가 있으며 그 주변에 상업지역(하늘색)이 넓게 빙 둘러싸는 형태입니다. 또한 주거지 양쪽에서 상업지로 공원(빨간색)이 돌출되어 뽀족한 형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상업지는 태화강의 울산교를 축으로 북쪽에 위치한 기존의 시가지 지역과 연결되어 있으나 전체적으로 신시가지 지역의 도시축이 남북방향에서 남동쪽으로 약간 꺽인 형태를 이루고 있는 것이 눈에 띄이는데요. 기존시가지인 읍치와 병영성 지역은 정남향을 축으로 삼고 있는데 반해 신시가지의 경우 그 축이 남북방향에서 동남방향으로 축이 어긋나 있는데, 이처럼 신시가지의 도시축이 기존의 울산읍치와 병영성의 축인 남북방향, 혹은 주변 자연지형 등과 상관없이 방향을 달리하는 것은 당시 계획 중이었던 철도노선과 관련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는군요.

위 그림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울산읍성과 병영성의 공간축이 정남향을 이루고 있듯이 울산이라고 하는 도시가 남북방향의 명확한 도시축을 가지게 된 것은 비단 풍수지리와 유교사상에 근거한 질서체계 때문만은 아니었는데요. 울산의 시가지가 자리 잡은 곳은 북쪽에는 낮은 구릉지가 시가지를 감싸면서 그 앞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넓은 강과 남쪽으로 펼쳐진 넓은 평야지대를 가지고 있어요. 이처럼 지형적 조건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공간구조적으로 남북방향으로 명확한 축이 형성되었답니다. 하지만 이러한 자연순응적 도시축이 바뀌게 된 것예요. 이 당시 기존의 도시축과는 다른 새로운 도시축을 신시가지에 설정하게 된 배경에는 철도노선 변경계획이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최근 확인되었다는군요(한삼건, '전게서' p123-124참고)

1962년경에 계획되었던 이상의 도시계획을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감안하지 않고 지금의 관점에서 평가하는 것은 불합리한 측면이 없지 않아 있는데요. 하지만 그 이전의 이케다의 계획안에서도 확인되었듯이 새로운 시가지를 계획하는데 있어 기존의 도시지역과의 관계설정을 지나치게 가볍게 여겼다는 점은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네요. 수백 년간 이어져 오던 행정, 상업, 금융 등의 중심지로서의 기능이 하루아침에 신시가지로 옮겨지지 않고 결국 분산되어버리는 형태가 되어버렸다는군요.

위 그림은 1914년의 5만분의 1 지형도에서 도로만을 추출한 것과 1967년 촬영된 항공사진 상에서 확인되는 주요 도로를 추출하여 재작도한 것인데요. 기존의 시가지가 있던 지역을 살펴보면, 울산면 주변 도로가 이전에 비해 많이 복잡해져 있는 모습이 확인되는데요 이는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이루어졌던 도로정비로 1960년대의 개발과는 무관한 것이었고, 이외에는 1967년 대부분의 도로망은 이전 시대 연도에 해당되던 도로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는군요. 이에 비해 신시가지에 해당되는 아랫부분의 신정동 지역에 격자형의 도로망(초록색)이 건설되고 있는 모습이 확인되며, 공업단지가 건설되고 있던 대현면 일대(분홍색)에도 기존의 도로망과는 무관하게 도로들이 늘어나고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1914년 당시의 2등도로의 흔적은 아직은 남아 있으며 그 위로 새롭게 축을 달리한 새로운 도로망이 덧씌워지고 있네요.

옆그림과 아래그림은 1962년 공업센터 지정 이후 울산지역에 진행되었던 각종 개발사업에 관한 기록들을 종합하여 그 발생건수를 정량적으로 분석한 것이라는데요. 이에 의하면 공업센터 지정 이후 공장건설과 함께 각종 도로 정비 사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한 공장과 기반시설 건설공사는 60년대 중엽에서 1970년대 중엽에 걸쳐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네요. 이러한 공장과 기반시설 건설공사는 60년대

중엽에서 1970년대 중엽에 걸쳐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며 이후에는 비교적 잦아들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어요. 공장 건설이 활발해짐에 따라 사택의 건설도 활발해 지는데, 사택건설은 비교적 꾸준하게 진행되어 1980년대 중반 이후에 조금 더 활발해 지는 경향이 있네요. 이와는 별도로 택지개발 및 토지구획정리 사업도 진행되는데 택지개발의 경우 1980년대 들어 시작되었는데 비해 토지구획정리 사업은 60년대부터 시작되어 꾸준하게 진행되는군요.

도로와 관련하여 살펴보면 1962년 12월 도시계획 간선도로 6호노선의 축조공사를 시작하고 63년에는 사연제 진입로, 야음동, 상개동, 고사동 등 공없센터 인근 지역의 도로 공사에 착수하였으며, 기존 시가지와 신시가지를 이어주는 태화교 공사도 1963년 시작되었네요. 이후 거의 대부분의 도로공사는 공업지역과 신시가지에서 집중적으로 이루어 졌고, 이때까지 공장건설의 대부분이 남구 지역에서 이루어졌어요. 남구 이외의 지역에서는 1968년 10월 현대자동차가 준공되면서 다음 해인 1969년 명촌교와 염포연결가로 축조공사가 시작되면서 명촌, 연암, 화봉동 지역에 도로가 건설되기 시작하였어요.('울산시사(1987)' p550-561 참고)

위 지도에서 대현면 방면에서 신시가지 남단을 지나 서쪽으로 이어지는 새로 건설된 도로가 도시계획 간선 도로 6호노선인데요. 즉 공업지역과 울산 외부를 연결하여 각종 물자와 생산품을 운반하기 위한 도로가 가장 먼저 건설되었음을 알 수 있어요. 또한 이 시기 즉 1960년대에는 토지구획정리 사업이 3곳에서 진행되었는데 지금 시청이 위치한 월봉1공구와 그 옆의 월봉2공구가 각각 68년과 69년에 사업이 완료되었어요. 이와 함께 남쪽 야음/선암동 지역에 야음/선암지구가 1969년 사업이 완료된 지역이에요. 울산에서 가장 먼저 토지구획정리 사업이 실시된 것은 가장 먼저 완료된 월봉1공구로 1963년 5월 시행에 들어갔는데, 이 다음에 부곡지구가 같은 해 7월에 시행에 들어갔으나 사업완료는 다른 지역보다 조금 늦은 71년 5월에 완료되었어요.

이외에 사택도 북구 달천동에 대한철광개발(주)의 사택이 1965년 건설되었고, 이후 1967년에는 영남화학 사택과 한국석유공업 사택이 남구야음동에 들어섰구요. 그리고 무거동 지금의 신복로타리 입구 부근에 한양화학 사택이 1969년 건설되었다네요. 이들 사택들의 위치는 대한철광개발 사택을 제외하고는 공업지역과 외곽으로 연결되는 6호노선 주변에 위치하고 있네요.

하지만 1969년 11월에 건설된 동부한농 사택은 중구 복산동에 입지하였는데, 공장과의 연결도로도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 공장지대와는 상당히 동떨어진 곳에 입지하였다는 점이 특이하네요. 뿐만 아니라 그 바로 옆에는 이듬해 한국비료 사택이 더욱 큰 규모로 완공되었어요. 이들 두 사택이 입지한 곳은 앞서 살펴보았던 신시가지 지역과 마찬가지로 그 기준을 알 수 없는 방향으로 축이 틀어져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위 그림을 통해 개발 당시 주변 상황과 비교해 보면 서쪽의 각 학교 주변의 도로축과 서쪽 병영성의 축은 남북 방향임을 알 수 있어요. 뿐만 아니라 사택지 남쪽의 농경지를 살펴보아도 남쪽으로 흐르는 듯한 모습으로 농경지가 나누어져 있는 것도 확인하실수 있어요. 하지만 사택지 바로 앞을 지나는 도로는 일제시대 지도상에서도 확인되는 도로입니다. 1914년 지도에서 도로를 추출한 지도에서 보이는 도로망에서 울산읍치와 병영성을 이어주는 도로가 바로 이 도로입니다. 결국 기존의 읍치에서 병영을 연결해 주는 도로축을 따라서 전체적인 사택지 배치와 함께 전면 도로까지도 개설하였던 것으로 판단되는군요. 또 한 가지 1962년의 도시계획도를 살펴보면 이 부근의 도로구조가 실제로 이와 유사한 형태를 이루고 있는 것이 확인됩니다. 다만 이전의 계획에서는 실제로 건설된 것보다 훨씬 더 길게 뻗어 태화강 가까이까지 내려와 있는 것이 차이점이네요.

이 시점까지의 개발을 살펴보면 사택지 부근에서는 명확한 직교형의 공간구조를 만들고 있지만, 남쪽으로 내려와 반구동 지역에서 철도와 새로 개설된 도로와의 관계가 어정쩡한 형태가 되고 있어요. 하지만 원래의 계획상에서는 철도가 이설되는 것을 예정하고 도로를 계획하였기 때문에 항공사진과 같이 예각으로 도로축이 만나지 않고 사택지 전면의 도로축과 나란하게 병영성 방향으로 도로가 개설될 예정이었어요.

이처럼 특징 지역 안에 다양한 방향축을 만들어 버림으로 인해 도시공간이 확장됨에 따라 다양한 축이 만나게 되는 경계에서는 공간구조가 복잡해 질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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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그림과 도표까지 손수 작성하셔서 이 논문을 게재하신 김헌규 교수님의 노고가 느껴집니다. 울산이 도시로서 어떻게 성장했는지, 사실은 소소한 면일수 있는데요. 일개 면에서 도시로서의 기능이 부여되고 도시가 건설되는 것을 조금이나마 느낄수 있는 글이었어요.

옮기면서 나름대로 이리저리 내용도 살펴보고 그림과 도표를 곰곰 들여다보니 여러가지 생각들이 일어났다 사라졌다 합니다. 재미있었어요..

다음에는 제대로 된 도시로서 공간구조의 기틀 확립과 시가지 확산에 대해 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