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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야기

신영복의 담론을 읽고

신영복 담론을 읽고

 


세계와 인간 - 인문학은 그것을 들여다 보는 것, 인간과 인간 사이, 관계를 들여다 보는게 그의 세계와 인간의 독법이다. 감옥에서 20년간 밑바닥까지 겪은 인간에 대한 관심과 경험이 '관계'라는 도구를 도출해 내놓은 것이다.

바라보는 방법 - 우리는 책을 통해 경험한다. 그래서 글, 문자라고 하는 전달매개체에 익숙하다. 글은 추상화된 인식체계를 반영한다. 글을 통해 전달되는 것은 학습된 내용에서 뽑아져 나온다. 배우지 않은것을 상상하기도 힘들다. 상상해도 자신이 이전에 가지고 있던 것의 모습이 덧칠 될 뿐이다.

음악, 시, 미술 - 글에 더하여 시의 음률이나 음악의 음률, 눈 앞에 펼쳐진 대상을 시각적으로 보는 것은 한층 더 확장된 시각을 준다. 파도치는 바다를 보고 있는 당신, 눈앞에 바람과 파도의 흰 포말과 밀려왔다 밀려가는 물결, 글로 표현하는 것은 그 중의 일부를 뽑아 놓은 것이다.

공감하는 삶 - 삶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안정감 있는 환경이다. 그리고 믿어주는 사람들. 함께 느끼는 순간들, 함께 즐거운 시간을 가지고, 함께 눈물 흘리는 것, 가족이 그것이고 친구가 그렇다. 직장 동료와 지역사회의 주민들까지 확장된다면 우리의 삶은 어떻게 변하게 될까?

공부 - 논어의 述而不作을 말하며, 자신의 공부도 고전에 다나와 있었던 것이라고 말한다. 한가지 추가하자면, 그 고전의 독법을 자신만의 체계를 가지고 운용하니, 모든 공부에는 자신의 관점이 들어있고 그것은 자신의 것이 된다. 한가지로 모든 것이 소통되는 것이다. '관계'로..

맹자, 이양역지 - 以羊易之 임금이 끌려가는 소가 눈물 흘리는 것을 보고 양으로 바꾸라 한 고사이다. 내 눈앞에 있는 것은 그 슬픔과 생명을 보지만, 보지 못한 양은 또 어쩔까? 관계의 형성을 나타낸다. 이어지는 것이 있음으로 관계가 형성된다. 하지만, 그 왕의 어리석음은 못 비껴난다.

장애여인의 출산 - 우리는 다른 이를 볼때 이렇다 저렇다 판단한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나에 대한 것이다. 숲 속, 어느 허름한 집에 장애가진 여인이 홀로 아이를 낳았다. 밤도 늦어 홀로 낳은 그 아이를 , 그녀는 촟불을 켜고 바라본다. 다른 어떤 일도 아니고 우선하여 불을 켜고 아이가 어떠한가 바라보는 그녀의 마음은, 애절하다. 자신의 장애가 아이에게도 비쳐나올까 저어하는 것. 우리는 내 모습을 가슴 깊은 곳에서 찾아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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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론은 신영복의 시선으로 후기 근대사회의 끝자락에서 바라본 우리 인간이 당면한 문제적 상황들을 헤쳐나갈수 있을지 우려와 대안을 모색하고 그것을 하나씩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내용이다.
라틴아메리카의 스페인 무뢰배들의 침탈에 애닳아 하다가, 라틴아메리카 후인들의 생뚱맞은 그래도 우리는 북미보다는 낫다는 말에.. 휴..

북미의 이야기 한자락, 포레스트 카터의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은 미국 남동부 애팔래치아 산맥에서 살아오던 체로키 족의 이야기인데, '어린나무'로 불리는 인디언 어린이가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는 체로키 족의 인간과 자연에 대한 애정을 감동적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그중에 신영복에 잊히지 않는 대목!

-체로키 족이 그들의 보금자리에서 쫓겨나 황량한 인디언 보호구역으로 강제 연행되는 행렬의 모습이다. 1838년부터 1만3천명의 체로키들을 차례로 오클라호마 보호구역으로 강제 이주시킨다. 1,300km를 이동하는 동안 추위와 굶주림으로 무려 4천여 명이 목숨을 잃는다. 전체의 3분의 1이 넘는 사람들이 죽어 가는 행렬이었다. 행진을 재촉하는 정부군 백인 병사들은 죽은 사람들을 매장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 3일에 한번씩 매장할 시간을 주었기 때문에 죽은 어린이와 가족들을 가슴에 안고 걸었다. 이 행렬을 '눈물의여로'라고 불렀지만, 체로키들이 울어서 그렇게 부른 것은 아니었다. 체로키들 중에서 어느 한 사람 우는 사람이 없었다. 얼굴에는 어떤 표정도 내비치지 않았다고 서술하고 있다. 남편은 죽은 아내를, 아들은 죽은 부모를, 어미는 죽은 자식을 안은 채 하염없이 걸었다. 죽은 여동생을 안고 가는 어린아이는 밤이 되면 죽은 동생 옆에서 잠이 들고 아침이 되면 다시 죽은 동생을 안고 걸었다. 그러나 이러한 행렬에서 가장 충격으로 남아 있는 장면은 마차였다. 빈 마차였다. 정부군들은 마차와 노새를 타고 가도 좋다고 허락했지만 아무도 타는 사람이 없었다. 심지어 좌우에서 호위하는 백인 병사를 쳐다보는 일도 없었다. 백인 마을을 지날 때 백인들은 덜거덕거리며 행렬의 뒤를 따라가는 빈 마차를 보고 어리석은 체로키들을 비웃었다. 그러나 체로키들 중 어느 누구도 웃거나 그들을 쳐다보는 사람이 없었다. 빈 마차는 그들의 자존심이었다. 나는 지금도 이 대목이 마치 내가 이 침묵의 행렬 속에 있었던 것 같이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콜롬버스 이후 지금까지의 세계 질서는 본질에 있어서 조금도 변함이 없다.

 

- 보태어 적다.

 

 마지막 장, 석과불식편이다. 타계한 지인의 녹음된 전화목소리에 대한 그의 반응과 수형생활 10년차의 재소자가 자살했던 사건을 보면서 그는 생각한다.

“내가 자살하지 않은 이유는 ‘햇볕’ 때문이었습니다. 겨울 독방에서 만나는 햇볕은 비스듬히 벽을 타고 내려와 마룻바닥에서 최대의 크기가 되었다가 맞은편 벽을 타고 창밖으로 나갑니다. 길어야 두시간이었고 가장 클 때가 신문지 크기였습니다. 신문지 만한 햇볕을 무릎 위에 받고 있을 때의 따스함은 살아있음의 어떤 절정이었습니다. 내가 자살하지 않은 이유가 바로 햇볕 때문이었습니다. 카뮈의 ‘이방인’에서 뫼르소는 햇볕 때문에 아랍인을 죽였다고 하지만 겨울 독방의 햇볕은 내가 죽지 않고 살아가는 이유였고 생명 그 자체였습니다. 나는 신문지 크기의 햇볕만으로도 세상에 태어난 것은 손해가 아니었습니다.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받지 못했을 선물입니다. 지금도 문득 문득 그 시절의 햇볕을 떠올립니다.

내가 자살하지 않은 이유가 햇볕이라고 한다면, 내가 살아가는 이유는 하루하루의 깨달음과 공부였습니다. 햇볕이 ‘죽지 않은’ 이유였다면, 깨달음과 공부는 ‘살아가는’ 이유였습니다.“라고 말한다.

 

나도 이제 알게 되었다. 공기가 있어 너무나 감사하다. 내 주변에 깨끗한 공기가 있고, 시원한 물이 있다는 것에 전율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나에게도 깨달음과 공부는 큰 힘이다. 살아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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