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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야기

중론, 논리로부터의 해탈 논리에 의한 해탈

 

 

 

p50.

세상만사는 모두 다른 것과 얽혀서 발생한다. 홀로 발생하는 것은 없다. 싹은 반드시 그 씨앗이 있어야 발생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싹은 씨앗 등에 의존하여, 얽혀서 발생한다. 그런데 얽혀서 발생하는 것, 즉 연기하는 것은 우리의 생각으로 묘사할 수 없다. 우리의 '생각'은 흑백논리에 따라 작동하기 때문이다. '생각이란 놈'은 있음(有)을 부정하면 없음(無)을 떠올리고, 같음(一)을 부정하면 다름(異)을 떠올리게 마련이다. '싹의 발생'이 생각의 대상이 될 경우, 씨앗에 '없던' 싹이 발생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든지, 씨앗에 '있던' 싹이 발생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중략..

싹이 씨앗 속에 미리 존재했다면 싹이 다시 발생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중략..

그와 반대로 어떤 싹이 애초의 씨앗 속에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오류에 빠진다. ..중략..

어떤 사람은 '싹 전체'가 아니라 '싹의 요소'가 씨앗 속에 있는 것이라는 제3의 이론을 제시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싹의 요소가 씨앗 속에 있다'는 판단은 '싹의 일부는 씨앗 속에 있고, 다른 일부는 씨앗 속에 없다' 는 판단으로 재해석되며, 이는 결국 '싹이 씨앗 속에 있으면서 없다'는 판단이 될 뿐이다. 무언가가 있으면서 동시에 없다는 것은 모순된다. ..중략..

그와 반대로 싹이 씨앗 속에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는 제4의 대안을 제시할지도 모른다. 있음도 부정하고 없음도 부정하는 판단은 '흑백논리로 작동하는 우리의 사유'의 세계에 들어올 수 없는 무의미한 판단이다

 

p62.

불교 경전에 등장하는 갖가지 개념쌍들을 이러한 기본 틀 속에서 대입하여 그 실체성을 비판하고, 그런 개념쌍들로 구성된 네가지 판단 각각이 범하게 되는 논리적 오류를 지적하는 것이 <<중론>>의 저술 방식이다. ..중략..

영원한 아뜨만(我)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모두 부단히 흘러가는 우리 의식의 한 모습일 뿐이다.

 

p66.

우리가 작년의 나와 지금의 내가 같다고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는 과거의 기억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기억도 무상하게 변한다고 가르친다. 변치 않는 자아(Atman)에 기억이 새겨졌다가 시간이 흐른 후 나중에 기억을 되살릴 때 그것이 회상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일이 기억되는 것도 하나의 흐름이고, 그것을 회상하는 것 역시 하나의 흐름일 뿐이다. 사슬이 풀리듯이 회상이 일어난다. 회상이란 현재 나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반응일 뿐 과거가 그대로 재현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망각이나 기억 착오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몸이든, 마음이든 한 순간도 머물러 있지 않다. 매 찰나 변해 간다.

 

 

 

요즘 열하일기를 열심히 읽고 있습니다만, 어제 우연히 행정자료실에서 본 '용수의 사유'라는 책을 보다가 제가 읽던 '중론' 기초서적을 다시 들었답니다.

 

불교는 참 논리적이구나 생각합니다만, 그 논리를 깨어야만 한다는 것을 2천년 전의 '용수'라는 분이 알려줍니다.

 

논어에서 공자가 흐르는 물을 보고 탄식하던 모습이 떠오른답니다.

 

몸도 1개월 이내에 들어온 물질들로 다시 구성되고, 또 생각도 수시로 바뀌는 존재인 우리!

 

<참고서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