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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야기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 공부 제1권

 

 

 

 

 

 

1장. 모든 기예와 탐구, 모든 행위와 선택은 어떤 좋음을 목표로 하는 것 같다.

      행위, 기예, 학문은 여러 종류가 있기에 그 목적들 또한 많다.

      총기획적인 것의 목적이 그것 아래에 놓이는 다른 모든 목적들보다 더 선택할만하다.

2장. 행위 대상의 목적이 다른 것들 때문이 아니라 그 자체일때(다른 것들도 이 목적을 추구), 이것이 최상의 좋음이다.

      최상의 좋음이 어떤 학문에 속하는지 파악하자면, 가장 총기획적인 학문에 속할 것이며, 그것은 정치학이다.

      따라서, 정치학의 목적은 '인간적인 좋음'일 것이다.(개인보다 큼 범주로서)

4장. 정치학이 추구하는 '인간적인 좋음'은 '행복'이다.(잘 사는 것, 잘 행위하는 것)

      행복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음.

5장. 향락적인 삶, 정치적인 삶 그리고 관조적인 삶의 세가지 행복에 대해(통속적 분류)

      즐거움을 위해 사는 삶은 짐승들의 삶으로 이 삶에 완전히 노예가 된다.

      교양있는 사람, 실천적인 사람은 명예를 선택하는데, 대개 명예가 정치적 삶의 목적이나, 이것은 추구하기에 피상적이다.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은 좋음이나, 명예는 받는 사람보다 수여하는 사람에게 더 의존한다. 좋음은 고유한 어떤 것으로 우리에게서 떼어 낼 수 없는 것이므로...

      그들이 명예를 추구하는 것은 자신들이 좋은 사람이라는 확신을 얻기 위해서이다. 실천적 지혜를 가진 사람들이나, 또 그들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그들의 탁월성을 근거로 명예를 얻고자 한다. 탁월성이 명예보다 좋음에 가깝다.

      그렇다고 탁월성 만으로 행복해지지는 않으므로 불완전하다.

      돈을 버는 삶은 일종의 강제된 삶이고, '부' 자체가 우리가 추구하는 좋음은 아니다.

6장. 보편적 좋음(이데아) 즉, 좋음은 무엇임에 있어서도, 어떠함에 있어서도, 또 관계에 있어서도,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 하나의 공통된 이데아는 없다.

7장. 우리가 추구하는 (목적으로서) 좋음은, 그 자체로 추구되는 것으로 다른 것 때문에 선택되는 일이 없는, 단적으로 완전한 것이라 말해지는 좋음. '행복'이 그것인 듯하다.

      그 자체만으로도 삶을 선택할 만한 것으로 만들고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도록 만드는 '자족성'에 대해서 고려해보아도 완전한 좋음으로 '행복'이 바로 그렇게 자족적이다.

      그러면 행복은 무엇인가? 인간의 기능(ergon) 안에 사람들의 좋음과 잘함이 있다.

      인간에게 고유한 것은 '이성'이다. 이성에 복종하거나, 이성을 가지고 사유하는 삶의 두가지 방식으로 살고 있다.

      인간의 기능은 이성에 따른 영혼의 활동이다. 어떤 기능적 일을 수행하는자와, 그 일을 훌륭하게 수행하는 자 사이를 비교하면, 모든 경우에 단적으로 훌륭하게 수행자는 자에게는 탁월성에 따른 우월성이 부가되며, 이와같이 인간적인 좋음은 탁월성에 따른 영혼의 활동일 것이다.

       그 좋음은 완전한 삶(평생-장시간의 삶) 안에 있을 것이다. 한 마리의 제비가 봄을 만드는 것도 아니며, 날 좋은 그 하루가 봄을 만드는 것도 아니듯이, 짧은 시간이 행복한 사람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8장. 앞의 원리에 따른 행복의 정의가, 현재 통용되고 있는 행복의 통념과도 맞아야 한다.

      좋음들은 통상, 외적인 좋음, 영혼에 관계된 좋음 및 육체에 관계된 좋음의 세가지로 이야기되고 있다.(영혼 관계된 좋음이 최고로 좋은것)

      또 목적은 어떤 행위와 활동에 있어서도 영혼에 관계된 좋음이기에 옳다.

      행복한 사람은 잘 살고 잘 행위한다는 견해 또한 논의에 부합한다.

      행복을 탁월성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과도 부합한다.

      행복은 가장 좋고 가장 고귀하고 가장 즐거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은 명백하게 추가적으로 외적인 좋음 또한 필요로 한다.

      많은 일들은 마치 도구를 통해 일을 수행하는 것처럼 친구들을 통해, 또 부와 정치적 힘을 통해 수행되기 때문이다. (좋은 태생, 훌륭한 자식, 준수한 용모 등)

      그래서 행복은 외적인 풍요를 추가적으로 요구하는 것 같다. 이런 까닭에 사람들은 탁월성을 행복과 동일시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행운을 행복과 동일시 한다.

9장. 행복은 배워서(습관들임으로, 혹은 다른 훈련 방식으로)이거나, 아니면 신적인 운명이나 우연으로 얻어지는 것인지에 관한 문제가 제기된다.

      다른 무엇보다 신의 선물이라는 점은 이치에 맞다. 아니더라도 탁월성과 훈련을 통해서 생겨나더라도 여전히 신적인 것들 중 하나로 보인다.

      어떤 종류의 배움과 노력을 통해 행복해지는 것이 우연을 통해 행복해지는 것보다 낫다면, 실제로도 이러한 방식으로 행복해진다는 것이 이치에 맞다.

      우리가 탐구하고 있는 것에 대한 답은 지금까지의 논의와 다르지 않다.

      행복을 탁월성에 따른 영혼의 어떤 활동으로 규정했다.

      그러므로 동물은 행복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어린이 또한 그렇다. 행복에 대한 희망으로 축복의 말을 하는 경우 외에는 말이다. 탁월성에 한평생의 시간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일생을 살아가는 동안 변화들과 갖가지 우연들도 생긴다. 노년에 엄청난 불행에 빠져 불운을 당하고 비참하게 최후를 맞은 사람에게 누구도 행복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10장. 그렇다면 인간들 중 살아있는 동안에는 행복하다고 말할수 없고 그 끝을 보아야 하는가?

       어떤 사람의 운을 쫓아 그 자신의 행복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잘못되었다.

       인간적 삶은 운들을 추가적으로 필요로 할 뿐이며, 행복에 결정적인 것은 탁월성에 따르는 활동이고, 그 반대의 활동은 불행에 결정적이기 때문이다.

       인간적인 성취들 중에서 탁월성에 따르는 활동들은 학문적 인식보다도 더 지속적이다. (지속적인 영예로운 활동, 지극히 복된 사람들이 연속적으로 그들의 삶 유지)

       이들은 안정성을 가지게 되며, 일생 내내 행복한 사람으로 살것이다. 또 그가 '진정으로 좋은 사람이며 어느 구석 빠지는데 없이 반듯한 사람'이라면 인생의 갖가지 운들을 가장 훌륭하게, 모든 점에서 전적으로 적절하게 견뎌 낼 테니까.

13장. 행복은 완전한 탁월성에 따르는 영혼의 어떤 활동이기에, 탁월성에 대해 검토해야 한다.(인간적인 탁월성)

 

                                   1차적인 의미의 이성    :          [ 지적 탁월성이 관계하는 영역 ]

                               /  자체안에 이성을 가지고 있는 부분

            이  성  부  분

        /                    \

 영혼                             욕구적인 부분           :           [ 성격적 탁월성이 관계하는 영역 ] 

        \                    /    이성에 설복/저항하는 부분

           이성없는부분

                               \ 

                                    식물적인 부분 : 영양과 성장의 원인

 

         지혜나 이해력, 실천적 지혜는 지적탁월성으로, '자유인다움'이나 절제를 성격적 탁월성으로 부름.

         영혼의 상태들 중에서 칭찬받을 만한 것을 '탁월성'이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