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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란..

도암스님의 '보현행원품 강설' 제1강-2부

도암스님의 보현행원품 강설 (2016년 제1회 정종사 불교대학)

 

강의자료 : 보현행원품 강설 (혜남 저, 부다가야 출판)

 

강의일자 : 2016.1.7(목) 13:00~15:00

 

강      설 : 무문 도암스님

 

불교대학 : 양산 덕계 소재 '정종사' (주지 : 여해스님)

 

 

 

 

좀 쉬셨어요? (네)

 

(당부말씀)

책을 좀 읽어오면은 좋겠어요.

여기 있는 내용들을 한글자 한글자 다 읽으면서 이야기 하려면은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지금 1월달 2월달을 합쳐서 강의를 하려면은

(1월 정초 그때가 강의 일자와 겹치는지 모르겠네.

안겹치고 해도) 한 여덟 번이 총 횟수거던

 

열가지 원을 하고, 또 뒤에 게송들이 좀 더 있고 하니까

그러면 보통 하루에 두가지 단락을 다루게 되어 있어요.

그렇죠

근데, 저기 이거를 하나하나 꼼꼼하게 읽으면서 할 수 있느냐?

할 수 있죠. 그러면은 두단락 나가면은 두달이 지나가요.

그러면 안되겠지. 그래도 우리가 전체적인 맛을 봐야 되니까.. 그죠.

그럴려면 조금 도와주시는게 뭐예요? 좀 읽어오시면 좋아요.

 

내용을 읽어오면은 이해하기가 더 좋아요.

그거를 읽어봤는데 강의를 듣다보면은

아, 그 내용을 지금 설명하고 있구나, 이거를 좀 요렇게도 표현하는구나

 

제가 설명하는 내용은 이 책보다

책보다 책의 설명보다 듣기가 쉬워요.

 

그러고 책을 다시 읽어보면 책이 쉬워져

그러니까.. 그다음에 또 읽어 오시고.

 

그 다음에 아, 이거는 내가 읽어보다가 궁금했는데, 궁금증이 덜 풀렸다 그러면

그.. 강의가 시작되기 전에 이렇게 오셔가지고 질문하시거나

그다음에 강의 끝나고 나서 말씀하시면 되요..

 

그러니까, 어떻게?

강의시간에만 한다?

아니면은 그 앞뒤로 읽어오시는 부분에 대해서는 이렇게 할 수가 있으니까 읽어오세요.

 

(본문강의)

 

자, 여기에 어디냐 하면은

51쪽을 봅니다. 드디어 첫 번째 ‘예경제불’

제가 경문을 읽어보겠습니다. 51쪽입니다.

 

“보현보살이 선재동자에게 말씀하시기를 선남자야 ‘모든 부처님을 예배하고 공경한다 禮敬諸佛’는 것은 온 법계 허공계에 가득한 시방삼세의 일체 불찰 극미진수의 모든 부처님, 세상에서 존중받는 어른 諸佛世尊을 내가 보현 행원의 힘으로써 깊은 믿음으로 이해하기 信解를 목전에 대하듯 하여 청정한 몸매와 말과 생각의 활동 身語義業으로 항상 예배하고 공경 禮敬하되 낱낱 부처님 처소에 다 불가설 불가설 불찰 극미진수의 몸을 나타내어 불가설 불가설 불찰 극미진수의 부처님을 예배하되 허공계가 다하면 나의 예배가 다하거니와 허공계가 다할 수 없는 不可盡 연고로 나의 이 예경도 다함이 없어서 無有窮盡 이와 같이 내지 중생계가 다하며 중생업이 다하며 중생번뇌가 다하면 나의 예배가 다하거니와 중생계로부터 내지 번뇌가 다할 수 없는 연고로 나의 이 예경도 다함이 없어서 생각마다 서로 이어서 끊어짐이 없게 하여도 몸이나 말이나 생각하는 활동에 지치거나 싫어함이 없느니라.”

 

“보현보살이 선재동자에게 말씀하시기를 선남자야 ‘모든 부처님을 예배하고 공경한다 禮敬諸佛’는 것은 온 법계 허공계에 가득한 시방삼세의 일체 불찰 극미진수의 모든 부처님, 세상에서 존중받는 어른 諸佛世尊을” 자 여기에서 요말이 무슨 말인가

 

자 여기에서 아까 이렇게 이야기 했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이 시방으로 쫘악 펼쳐서 이렇게 무한대로 뻗어가는 거기를 시방의 세계 그러죠

 

시방세계 거기에 들어 있는

그다음에 삼세, 삼세라 그러면 어떻게 되요? 삼세는 과거, 현재, 미래

그러니까. 이렇게 쫙 펼쳐져 있는, 그중에서 과거, 현재, 미래에 세계 , 그 들어 있는 모든 불찰, 무수하게 많은 불찰의 세계를 가루로 몽땅 내서

그 숫자 만큼의 부처님, 숫자 많아요 적어요? (많습니다)

숫자많죠.

그분들에게,

그분들에게 어떻한다?

 

“내가 보현 행원의 힘으로써 깊은 믿음으로 이해하기 信解를” 그분들을 명료하게 이해하기를

 

바로 앞에 모시듯이 이해한다. “목전에 대하듯 하여 청정한 몸매와 말과 생각의 활동 身語義業으로 항상 예배하고 공경 禮敬하되”

 

자 여기에서 요렇게 나가는데, 우리가 여기에서 ‘시방삼세의’ 그랬죠.

시방은 이렇고 삼세는 과거, 현재, 미래

 

자 과거세에 세상에 출현하셔 가지고 과거세 중생을 제도해주신 부처님

우리가 보면은 비바시불, 시기불 이런 분들이 있죠. 연등불 이런 분들이 계셔요.

 

자 이런 분들이 과거세에 출현해서 과거세의 중생들을 제도해 주셨어요.

 

그 다음에 석가모니 부처님이 현재세에 출현하셔 가지고 현재세의 중생을 제도해 주시고

말씀이 남아서 우리한테 가르침을 주셔요. 그렇게

 

미래세의 부처님, 미래세에 출현하셔서 미래세 중생들을 제도해 주실 분인데,

이 미래세 부처님은 후보는 누구예요? 대표로

 

미륵부처님.

 

그다음에 또 더 확장하면 누구죠? 미래세에 성불할 분들이 누구죠?

 

일체중생들이 미래세의 모든 후보들이죠.

 

자 그러면은

일체중생 중에는 나하고 같이 사는 사람들은 포함이 될까 안될까?

나하고 인연 있는 분들은 포함이 될까 안될까? (됩니다)

 

그런데, 예경을 하라고 그랬어요.

그러면 그 저기 나하고 같이 사는 미래부처님의 후보는

내 손위만 있나요 내 손아래도 있나요? (아래도 있어요)

 

그런데, 마음을 어떻게

그분들이 다 뭐를 가지고 있어요? 불성.

자 불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어때요? 평등해요 안해요? (평등합니다)

평등해요?

불성을 가지고 있다는 거에서는 평등하죠.

자 나하고 같이 사는 사람. 내 손위가 되었던 내 손아래가 되었던

불성을 가지고 있고

나하고는 근본적으론 평등하고

표현되는 업이 다른 뿐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살아요?

안그러면 너하고 나하곤 종자가 달라 이렇게 생각하고 살아요? (웃음)

자 똑같이 불성이 있다는 것은,

너하고 나하고는 종자가 같은데, 현재 그 종자가 0.001% 표현됐느냐, 0.01% 표현됐느냐, 1% 표현됐느냐,

10% 표현됐느냐, 50%냐, 90%냐, 99%냐, 100% 표현됐느냐

가지고 있는 가능성은 똑같은데

자 이제 이런 입장에서 바라보면

자 이런 입장에서 바라보면 또 어때요.

그 다음에 우리가 과거생으로부터 쭉 윤회를 해 왔거던

윤회를 쭉 해오니까. 과거 무수한 겁, 그러니까 수를 셀 수 없는 긴 세월에다가

플러스 현재의 삶

40살, 45, 어떤 분은 80,

자 앞에 무한대가 있죠, 무한대 더하기 사십살, 사십오, 팔십 아니면 다섯살

누가 제일 나이가 많아요? (의미 없습니다.)

이거 큰 의미가 있어요 없어요?

자, 다섯 살하고 팔십은 굉장히 나이차가 커잖아요. 그런데 의미 있어요 없어요?

요 의미를 떼놓고 생각하면 평등에 가까이 가요 안가요?

윗사람, 아랫사람 이러면서 마음에 걸리던 장애물이 남아요. 사라져요? (사라집니다)

그렇죠

이 장애물이 사라지고 나면

내가 먼저할까 니가 먼저할까 이문제는 어떻게 되요. (없어집니다)

그쵸

자 여기에서

이렇게 저기 공경하는 마음은 뭐죠.

공경하는 사람에게 거짓으로 대할래요. 진실하게 대할래요?

공경하는 분한테 정성을 다하겠습니까? 정성을 빼고 하겠습니까?

공경하는 분한테 배려할래요 안할래요?

공경하는 분한테 사랑을 담겠습니까 안담겠습니까?

자, 이마음을 담았어요. 이 마음을 가득 담아가지고

자식이 부모를 향해서 표현하면 뭐죠? 효도

이마음을 가득 담아서 부모가 자식을 향해 표현하면 뭐죠? 자애심

그렇죠

이마음을 가득 담아서 친구사이에 표현하면 뭐죠? 우정

이마음을 가득 담아서 부부사이에 표현해요? 부부애

그러죠

자 그런데, 내가 이렇게 표현해

그런데 표현하면서 뭐냐하면

나하고 인연 있는 사람도 이것을 표현할 수 있도록 안내를 해주면 되요.

나도 지금 서툴고 상대도 지금 서툴지만, 서로 뭐냐하면

순도 100%의 표현이 되는 그날까지 계속 이런

그 마음의 순도를 높여가는 연습을 하는거예요

자식을 향해서는 순도를 낮춘다? 높인다?

공경하는 마음을 빼요 넣어요?

자식이,

우리가 어렸을 적에 보모님들이 우리를 존중 안해줬기 때문에 속상한게 있었어요 없었어요?

있었죠?

그런걸 세월 지나서 올챙이적 생각을, 개구리가 올챙이적 생각을 까먹고

시끄러워 이거시가

이렇게 되는 사이에 예전에 부모님으로부터 내가 부모님한테 한발 빼려고 하는 자세를 누구한테서 봐요?

아이들한테서 보죠.

뭐가 빠지면 관계가 망가진다? (공경심)

공경심이 빠지면.

그런데 어느 정도냐 하면

어느 정도 대상에다가 공경심을 표현하고 싶으냐 하면

아까 한 은하를 통으로 갈아서..

여기보면 미진에 대한 이야기가 어떻게 보면 좀 나오거던요.

그런데 그 미진에 대한 이야기가 그..

뒤에 이렇게 나오는데,

어디냐 하면 70쪽에 나오는데 꼭 읽어보세요.

제가 설명합니다.

부처님의 설법중에 어떤게 있냐 하면은

그 때 옛날 사람들이 알아듣게 하려면 비유를 해야 하잖아요. 옛날사람들이 알아 들을 수 있는 비유로

뭐냐하면. 티끌 중에는

좀 작은 것이 소의 털, 우모진

그 소의 털 뽀족한 위에 올라가서 ‘아 넓으네’ 하면서 안정적으로 안굴러떨어지고 그위에 있을수 있는 크기에 티끌, 작아요 안작아요? (작습니다)

작죠. 요게 우모진이에요.

요거를 일곱조각을 내면 ‘양모진’

양털이 소털보다 훨씬 가늘거던, 고 위가 넓네 하면서 안정적으로 있을수 있는거라.

그런데, 그것을 다시 일곱조각으로 내면은 ‘토모진’,

토끼털

토끼털은 더, 그것을 일곱조각을 내면은 수진이라 거래.

물과 물틈새

물과 물의 분자 사이로 그 틈새가 있는데, 그 사이를 빠져 나갈수 있는 크기라

우리가 물사이에 틈이 있는 걸 현대 물리학이나 되야 알았지 (그러게요)

옛날에 알았을까 몰랐을까? (몰랐습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셨다니까..

자 그다음에 그 수진을 다시 일곱조각을 내면은

금진, 뭐냐하면 금속 물체의 틈새를 빠져나갈수 있는 크기의 티끌이 된다.

우리 금속사이에 금속의 틈새가 있는지 알았어요? 몰랐어요?

우리 조상님들은 몰랐지.

부처님은 삼매속에서 별거를 다 보셨어.

현미경도 아니고 망원경도 아니고, 그죠.

그 다음에 그 금진을 일곱조각을 내면은

그게 이제 미진이 되요.

그것을 다시 일곱조각을 내면은 극미가 되거던

그러고 다시 일곱조각을 내면 린허진.

그 없는것과 거의 유사한 상태가 된다.

그리고 그걸 더 쪼개면 존재를 알아볼수 없는 상태가 된다.

이렇게 해서 티끌을 쭈욱 이야기 했어요.

그중에서 뭐냐하면 저기 은하를 통으로 갈았다고 했을때, 미진, 극미진 수라 그랬잖아요.

여기 보니까 극미진이라고 그랬죠.

그러니까 얼마나 작은지 알겠죠?

우모진도 아니고 양모진도 아니고 토모진도 아니고 수진도 아니고 금진도 아니고 미진도 아니고 극미

만큼 뽛아서 센 숫자만큼의 사람들

자 그정도 숫자의 사람들을 가슴에 품습니다.

자 사람들에게 내가 예경을 해야 되겠다. 이런 꿈을 가져야 되요.

그런데 내 옆에 있는 사람을 제껴 놓고 할까?

자 인제..

행원이라는 것은 뭐냐하면, 실천을 전제로 원을 발해요.

자, 원을 발하고 나면 내 주변에 있는 사람은 뭐예요?

배제해야 할 사람입니까? 기본으로 함께 해야할 사람입니까? 마음자세가 어떻게 되요.

그중에 내 자식 빼놓을 수 있어요? 없어요?

내 남편은?

그런데, 일방적으로 하는 겁니까? 쌍방이 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겁니까?

노력은 누가 먼저 시작하고? (내가 먼저 시작하고)

그러면서 어떻해요? 쌍방이 예경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거예요.

어떻게 될것 같아요.

이렇게 노력해가면서, 자 포기 한다 안한다.

한번 시도해보고 안되니까네, 안되는가베.. 끝?

그럴까요?

자 뒤에 읽어보겠습니다.

“낱낱 부처님 처소에 다 불가설 불가설 불찰 극미진수의 몸 身”

자 이제 이게 무슨 말인지 들어오죠?

“몸 身을 나타내며”

여기에서 뭐냐하면 우리가 이제 공부를 하고 마음이 넓어지고

하다가 삼매를 얻잖아요. 그러면 망원경이 없어도 보고, 현미경이 없어도 볼수 있는것 뿐만 아니라 뭐가 생기냐 하면은

관세음 보살님은 화신을 나투죠?

그래가지고 중생들에게 이런 중생들한테는 이런 모습으로 저런 중생들한테는 저런 모습으로 동시 다발적으로 모습을 나타내요.

단, 뭐가 있어야 되죠? 정성이 있어야

일심으로 정성을 모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 감응합니다. 그죠.

감응해요.

그렇듯이 이렇게 보현보살이 뭐냐하면

이렇게 부처님을 따라서 공부하고 수행한것 까지도

점점더 수준이 높아지면

수준이 안높을때까지 육신으로 하는건데,

수준이 점점더 높아지면 뭐를 해요?

화신을 나투어요. 그래서 그 화신 숫자가 공부를 높이 할수록 많이 나툴수가 있어요.

그래서 이렇게 많은 몸을 나투어서 낱낱의 께 하보고해서 자 이제 이게 무슨 말인지 들어오죠?

“낱낱의 몸 一一身으로 두루 불가설 불가설 불찰 극미진수의 부처님을 예배하되”

자, 부처님께 예배한다. 거기에는 가서 복을 짓는다 안짓는다? 복을 짓죠.

그다음에 자, 서로 이렇게 공경하고

우리가 부처님을 만나면 부처님을 우리를 공경할까요? 안할까요?

부처님은 우리를 성불시키려고 하는건데, 우리를 대접 해요? 안해요?

우리는

우리가 만나는 사람을 내 조건보다 훌륭하게 되도록 하는 마음이 있을까 없을까?

내가 만나는 사람마다.

요렇게 도와주려는 마음이 생기면 뭐가 생겨요? 수희공덕

음덕을 쌓을 수 있는

무수하게 은혜를 쌓을 수 있는 기회가 와요

“허공계가 다하면 나의 예배가 다하거니와”

자, 허공계가 쉽게 사라져요 안사라져요? 그러니까 한두번하다가 멈춘다?

“허공계가 다할 수 없는 不可盡 연고로 나의 이 예경도 다함이 없어서 無有窮盡 이와 같이 내지 중생계가 다하며 중생업이 다하며 중생번뇌가 다할때까지”

자, 내가 함께하는 사람의 업이 다하고, 번뇌가 다할 때까지

자 이렇게 예경하는 사이에

서로 예경합니다.

예경하기 전에 서로간에 업장이 있었어요? 없었어요?

서로 업장이 있죠?

업장이 있는 관계에서 시작을 합니다.

내가 온 힘을 다 모아서 진실하고, 정성스럽고 공경하고 배려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합니다.

그러면서 이왕

그러고 상대도 같이 할 수 있도록 계속해서 이렇게 해나갑니다.

그런 마음이 점점 커지면 커질수록

관계사이에 있어서 업장은 어떻게 되죠? (소멸됩니다.)

자, 먼저시작하는 사람이 훌륭할까요? 마지 못해 따라가는 사람이 훌륭할까?

여기 이대목에서 자존심이 필요해요?

“중생번뇌가 다하명 나의 예배가 다하거니와 중생계로부터 내지 번뇌가 다할 수 없는 연고로 나의 이 예경도 다함이 없어서 생각마다 서로 이어서 끊어짐이 없게 하여도 몸이나 말이나 생각하는 활동에 지치거나 싫어함이 없느니라.”

우리가 인제 이렇게 해나가면서 공부를 하는거예요.

우리는 뭘 하다보면은 한두번 하다가 잘안되면은

그 어떤 , 잘안되네 이러면서 좌절하고,

목표치가 분명히 짧아요.

인생을 살면서 어떤거를 성취하려고 하면

기본 수행 방법이 역카운트 하는거예요.

역카운트, 카운트가 세는거죠.

그런데 거꾸로 세요.

1000번을 기본으로 놓고 한번 시도하다가 실패했어요.

나에게는 아직 999번의 여유가 있다.

그러죠.

열심히 노력하다가 한계에 부닥쳐서 할 마음이 없어지면 그래도 999번

또 열심히 하다가 엎어지면 998번.

자 시작점을 이렇게 역카운트 천에서 시작하면.

우리는 보통 얼마정도 역카운트로 시작해요? 한번 두 번 많으면 세 번

보통 요자리서 엎어지거던.. 그죠.

그다음에 노력을 할때 ‘됐어, 그만하면 되’

‘그만하면 훌륭해’

아니 근데, 포기하는데 훌륭할건 아니고

우리가 살면서 사람을 위 할 때는 잘생각 해야되요.

장자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장자는 동양고전 중에 하난데

장자에 나오는 이야기 중에서 사람을 대하는 힌트가 되는 이야기가 있어요.

자 이런 말이 있죠.

니가 원하지 않는 것은 베풀지 마라

니가 원하는 것을 다른사람에게 베풀어라

이런 말이 있죠.

이 말이 맞아요? 틀려요? (맞아요)

기본적으로는 맞는데 100%는 아니예요.

자 그러면 100%가 안맞는것은 이부분이 있어야 100%가 되요.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은 안베풀고, 내가 원하는 것을 베푸는게 굉장히 중요한데

요기에다가 보충이 들어가야 되요. 보충

자, 보충합니다.

이 중국이 이렇게 있는데, 노나라는 내륙 땅이에요.

자 그러니까. 내륙땅이니까 바닷가에 있는 새를 볼 일이 있어요 없어요? (없습니다)

그런데 새가 날아들어서 궁궐로 들어왔어요. 바닷새가.

길잃은 새지

그런데, 노나라 임금이 보니까. 바닷새가 여기까지 날아드니까. 반가워요? 안반가워요?

너무 반가워.. 그래서 귀하게 대접했어요.

자기가 생각하기에 자기가 먹어봐서 제일 맛있는 음식을 대접했고

자기가 먹어봐서 제일 맛있는 술을 대접했고, 자기가 들어봐서 제일 좋은 음악을 대접했어요.

그 새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슬피 울다가 죽었더라.

.

.

.

.

(숙연)

그 사람한테,

내가 좋아하는거는 맞는데, 그사람한테 맞는지는 알아봐야 할거 아니예요.

배려.

이게 좋은걸 줘도 지랄이야..이러고. (조금은 쓸쓸한 웃음들)

이렇게 안되는 자리가 있는 거에요.

그쵸.

우리는 자,

그 기본 생활점을 평등자리에서 볼 수 있는 힘이 있는 연습하느냐 안하느냐

자, 나를 아래로 내려다 보는 사람을 만나면 그분 인격이 굉장히 훌륭해 보이죠?

아니면 내가 누군가를 내려다보면은 내가 대단해 보이지 않아요?

내가 누구를 알로 보면서 그때쯤에 다른사람이 나를 뭐로 봐요?

아름답게 바라볼까? 아니면 괴물에 가깝게 바라볼까?

우린 뭐죠. 행동을 괴물같이 행동하고 마음으로 사랑받기를 원하는

이런 것들이 있을까 없을까?

그러면서 가슴속으로 늘 앓고 있는 병이 하나 있어.

현대인들의 고질병.

애정결핍증

자, 예경제불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은

어때요. 과거세 부처님을 공경하고 예경하고

현재세 부처님을 예경하면서 부처님의 법을 따라 신장하는거예요.

그러죠

그거를 어디에서 연습해요? 미래세 부처님 후보들한테 연습하는거예요.

그럴때 부처님한테 하듯이 똑같이 하는거예요.

그렇게 연습을 해나가는데,

거기에서 공경하기 때문에 진실하고

공경하기 때문에 정성스럽고

공경하기 때문에 배려하고

공경하기 때문에 애정으로 대해요

그러면은 상대 입장이 보일까 안보일까?

자, 이렇게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은 상대 입장이 잘보일까 안보일까요?

그러면 상대 입장이 잘 안보였던거는

이런 마음이 작동되는 상태에서 상대를 느꼈을 까요?

아니면 이런 마음이 없는 상태에서 손익계산서를 딱 뽑아보고 내가 이익을 좀 보는 입장에서

계산을 하고 거기에다가 맞추려고 했을까?

자, 이런게 있어요. 내가 상대를 느낄때는 상대도 나를 느낄수 있는 힘이 생겨요. 통로가 됩니다.

그리고 나를 느끼는 사람한테는 내가 비밀을 유지하려는, 자물쇠를 유지할 수가 없어요. 그죠

나를 느끼는 사람한테는 이렇게

감정의 자물쇠가 없다고

우리는 누군가에게, 근데

편안하게 느껴보고 싶지 않아요?

편안하게

왜 감추어야 될까? 안진실하니까 감추어야지

왜 감추어야 될까? 정성스럽지 않으니까 감추어야지

왜 감추어야 될까? 배려가 없으니까 감추어야지

왜 감추어야 되죠? 애정이 없는데 애정 있는 척 하려니까 감추어야지

왜 감추어야 되죠? 공경심이 없는데 공경심 있는 척 하려니까 감추어야지

자 거 뒤에.

52쪽요.

거기에 1번 2번3번 이렇게 번호 있죠.

1번, 2번은 하지 마라는 예법인데,

1번 아만례, 이거는 이렇게 인사를 깍듯하게 잘하는데, 속으로는 생까는거를 말하는거예요.

자 그런 경우 있을까 없을까요? 자, 속내 들키고 싶어요 안들키고 싶어요?

그렇죠.

누가 그러고 있는거 보여요 안보여요?

나한테 속으로 쌩하고 하면서 겉으로만 인사하는거. 예를 차리는거

눈치 챌 수 있어요. 없어요?

있어요? 나는 총명해서 눈치채고, 다른사람은 내가 하는거 눈치 못챌까?

내가 말안했는데,

알수 있을까 없을까?

자, 우리는 감출수 있는게 있다고 하고 사는게 좋을까요?

감출수 있는게 없다고 인정하고 사는게 속이 편할까?

내가 속을 안까도 상대가 다 보고 있다. 이생각을 가지고 있으면은

스스로 다듬어 지는 자리가 있을까 없을까?

나의 삶에 비밀은 없다. 감추어도 감추어도 초라한 옷깃이 자꾸만 드러나네.

자 인제 이렇게

두 번째가 뭐냐하면

창화례, 창화례는 입으로

사람은 요즘에는 두 번째 예는 말로만 소리를 내면서 인사하는것을 말하는데,

예전에는 비교적 안정적이고 젊잖은 흐름에서 볼 때,

지금 우리가 강의하는 자리 정도에서

누가 아, 안녕하쇼~ 이러고 큰소리로 인사하면서 들어오는.. 이런 인사법

분위기에 안맞는..

이런것들은 인사를 한 것 같은데 좀 이상하죠.

세 번째는 공경례가 몸씨, 말씨, 마음씨를 다 담아서

몸으로 오체투지해서 인사하는 법도 있고, 절에서 인사하는 방법도 있고.

그다음에 설날 부모님한테 인사하는 법도 있고, 사회에서 인사하는 법도 있어요.

사회에서 인사하는 법 이렇게 인사하는 법도 있죠.

그런데, 그런 자리자리 마다 그 예법에 맞게 정성스럽게 하면 그것도 공경례가 되요.

서양에도 그 사회에서 공경례하는 법이 있을거예요.

그런것을 할때 형식으로 하느냐. 형식으로 하면 1번으로 가고 정성과 공경을 담아서 하면 3번으로 가요.

4번부터는 수행의 단계예요.

4번의 무상례는 이제 그, 자기의

자기가 불안하면 자기의 존재감을 강화시켜서 그 불안감을 줄이려고 하거던.

우리는 눈에 착시현상이 있어서 내 입장에서 바라보면 남은 작게 보여요.

철수 영희

나 →

← 나

이렇게 서로 바라보면 둘이 바라보는 시각에서 보면 뻑이 나요.

문제가 발생이 되요 안되요?

예경을 하게 되면

이 글자가 남의 글자가 커지죠.

그죠.

예경을 하지 않으면 기본적으로 문제가 발생되요 안되요.

우리는 아무 생각없는 사이에 아주 커다란 문제를 만들고 있어요.

그러고 왜그렇게 됐는지 모르겠다고 그러고

주머니 속에 이어폰 줄 꼬이는 것처럼 꼬이지

이렇게 바라보는데 안꼬일 리가 없잖아요. 그렇죠

무상례는 내 존재감이 상대의 소중함으로 인해서

내 존재감이 녹아져요.

또 내 존재감이 필요로 하지 않을만큼

그러죠

음 이런게 있죠, 어머니들은..

누군가를 만나서 음식을 먹는데, 니는 니 먹고, 나는 내꺼 먹고 할 때가 있죠.

그런데, 밥을 먹이면서도 니가 먹는 모습만 봐도 내가 배 부르다.

간극이 있어요 없어요? 실제로 그 앞에 사람이 맛있게 먹을때 내가 직접 먹는것 이상으로 충족이 되요.

심리적인 간극이 사라진다.

그러면 너와 나의 구별이 ..

그런데, 너무너무 부처님을 공경해서

심리적인 간극이 사라지는, 이러면서 인사를 드리는.. 무상례.

이런 무상례를 받아보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없어요?

그런데, 이거를 가르쳐줘야 배우지,

여기서 공부하시는 분들이 연습해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알려줘야 해줄거 아니예요.

세상에 본적도 들은적도 없는 것을 어떻게 할 수 있어요?

여기 있는 분들이 연습해서 가르쳐 줘야 되요.

사실 이런거 안되니까 맨날 애정결핍증 걸리는거 아니예요.

이런것 못받다 보니까.

자, 예경제불을 다시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보현보살이 선재동자에게 말씀하시기를 선남자야 ‘모든 부처님을 예배하고 공경한다 禮敬諸佛’는 것은 온 법계 허공계에 가득한 시방삼세의 일체 불찰 극미진수의 모든 부처님, 세상에서 존중받는 어른 諸佛世尊을 내가 보현 행원의 힘으로써 깊은 믿음으로 이해하기 信解를 목전에 대하듯 하여 청정한 몸매와 말과 생각의 활동 身語義業으로 항상 예배하고 공경 禮敬하되 낱낱 부처님 처소에 다 불가설 불가설 불찰 극미진수의 몸을 나타내어 불가설 불가설 불찰 극미진수의 부처님을 예배하되 허공계가 다하면 나의 예배가 다하거니와 허공계가 다할 수 없는 不可盡 연고로 나의 이 예경도 다함이 없어서 無有窮盡 이와 같이 내지 중생계가 다하며 중생업이 다하며 중생번뇌가 다하면 나의 예배가 다하거니와 중생계로부터 내지 번뇌가 다할 수 없는 연고로 나의 이 예경도 다함이 없어서 생각마다 서로 이어서 끊어짐이 없게 하여도 몸이나 말이나 생각하는 활동에 지치거나 싫어함이 없느니라.”

처음 읽었을때는 뭔 말인지 했는데, 더 보충이 되죠.

예경제불을 우리 생활에서 내생활로 해서 늘 생활속에서 예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산다.

이건 어때요? 삶의 질이 어떻게 될 것 같아요?

Before, After

연습을 해서 익숙해지는 과정을 뭐라 거래요. 수행.

수행이 뭐죠. 행위를 수련하는 과정이다.

수행이란 내가 가지고 있는 삶의 패턴이 있어요.

그런데, 내가 가지고 있는 삶의 행위 패턴은 행복을 많이 만들어 냅니까? 아니면 곤란함을 많이 만들어 냅니까?

그러면 곤란함을 많이 만들어 내는 패턴이 있으면 그것을 수정을 해.

자동차가 고장이 나면 수리를 하고 행위에 문제가 있으면 수련을 해야 해요

그렇죠 행위를 수정하는거예요. 행위의 메커니즘을 바꾸어 주는 거예요.

이렇게 해나가면서 하나를 성공하는 만큼 삶의 복이 늘어요.

이 예경제불을 실천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냐 하면 점점 더 사람이 위축돼 가지고

자꾸자꾸 자기를 구석으로 몰아요.

관계망도 점점 더 고약해지고

실제 그런 일이 생기나요 안생기나요. 그러죠

그리고 마음의 빗장,

누군가와 사이가 안좋아졌어. 그러면 사이가 뻑뻑하거던

마음자리, 그죠

뻑뻑할때가 있어요.

그쪽에서 접근해도 툭 쳐낼때가 있어요.

그렇죠

그런데, 상대가 접근할 때 툭 쳐내지만,

쳐낼때 왜 쳐내요.

상대가 나한테 접근해야 되는 코드가 있는데, 그 코드를 못잡고 엉뚱한 데만 건드리고 있거던

그래요 안그래요.

사실은 내가 툭쳐내는 입장에서 상대입장에서는 까다로울수 있어도

내 입장에서 보면 풀어줄수 있는 자리가 아예 없는거는 아니죠.

있긴 있는데 그 자리를 상대가 못찾은 그거던, 그래요 안그래요.

그런데, 묘하게 그 코드를 무슨 보물이나 되는 것처럼 꼭꼭 숨겨놓고 안 보여줘

그래요 안그래요. 그 자리 들켜가지고 상대가 타고 들어오면 풀어야 되니까..

꼭꼭 감추거던, 그리고 상대가 알아차려도 아닌것처럼

그쵸

그럴때 있어요 없어요.

그런데 예경을 하는 입장에서는 뭐죠.

상대가 그 코드를 찾을수 있게 도와주는 것도 예경하는게 될까요 아닐까요

그리고 상대의 그 코드를 찾기위해 노력하는 것도 예경하는게 될까요 안될까?

이 부처님 법문에 따라서 우리가 살아가게 되면

괴로움의 양은 줄고

행복의 양은 늘고

어리석음은 줄고

지혜는 늘고

동의합니까? (네)

오늘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