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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야기

톰 아저씨의 오두막

 

톰 아저씨의 오두막을 읽고

․ 지은이 : 해리엇 비처 스토
․ 번역 : 이종인
․ 출판사 : 문학동네
․ 출판일 : 2011.2.25

헤리엇 비처 스토의 소설, ‘엉클톰스 캐빈’이라는 제목이다. 지금상태가 그때와 다르다고 생각한다. 그때는 노예 상태였고, 미국 남부 농장에서 자신들이 바라는 삶이 아니라 농장주의 의도에 따라 살아야 했었다.

가만히 보면 지금은 달라졌는가? 의문이다. 지금은 돈을 가지고 있고, 회사나 자본의 권력을 가진 사람들 아래에 있다. 돈에 쫓기듯이 돈을 쫓아서 살고 있다. 노예제 아래와 달리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고, 좀 더 자유스럽지만, 돈의 노예가 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그때나 지금이나, 좋은 사람들과 좋지 않은 사람들은 항시 있나보다.

한때 주인공의 주인이 되었던 ‘세인트클레어’는 남부의 대농장주의 아들로 유산으로 많은 재산을 보유하고 있다. 그는 남부사회의 일원이다 보니, 자신이 바라는대로 살지 못하고 있어, 본인만이라도 흑인노예들에게 고통을 주지 않고 노예제 안에서 자유롭게 살도록 하고 있는 이다. 그는 이런 말을 한다.

“이런 식으로 조직되어 있는 사회에서 명예롭고 인도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할 수 있는게 뭐겠습니까? 눈을 감고 마음을 무감각하게 사는 수 밖에 없어요.”

우리의 주인공 흑인노예 ‘톰’이 북부 켄터키 주의 인정 많은 ‘셸비’씨의 집에서 주인을 잘 받들고 살고 있었는데, 악덕 노예상인에게 속은 주인이 빚을 갚기 위해 톰을 남부로 팔게 된다. 평소 ‘톰’은 하나님에 대한 경건한 마음을 가지고 주인을 신실하게 받들어 모시는 이였다.

미시시피 강 위에, 팔려가는 배안에서 꼬맹이 숙녀를 만나 친하게 된다. 아름다운 7살짜리 ‘에바’라는 아이인데, 이 아이가 물에 빠지게 될 때 구해주어 그녀의 아버지인 ‘세인트클레어’가 고마움의 표시로 톰을 노예상인에게서 산다.

세인트클레어의 가계는 영국에서 건너와서 북부에 큰아버지 집안이 있고, 남부에 자신의 아버지가 대농장주로서 살아왔다. 북부쪽은 노예제도를 폐지하자! 남부에서는 노예가 꼭 필요하다! 하며 반목하고 있는 데, 그 이면에는 돈이 있다.

북부는 산업화 되어 흑인들의 일도 마차나 몰고 기계나 돌리고 있지만, 남부에서는 백인이 농장을 일구어서 농업을 이끌어 갈 수는 없다. 노예농업으로만 그 사회가 유지되고 있었던 것이다.

세인트클레어에게는 쌍둥이 형이 있는데, 아버지의 대농장과 노예들을 물려받아 남부의 전형적인 노예농장주의 모습을 보인다. 그의 형과 상반되게 싱클레어는 양심적이고 노예들을 잘 돌봐주지만, 이 제도를 뒤집을 수는 없다고 하면서 말하는 부분이다. 조직되어 있는 사회에서 자기가 명예롭게 살고 싶어도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그 반대편에 서 있는 사람들에 대해 그가 하는 말을 들어보자.

“그 제도에 의해 돈을 벌어들이는 농장주들, 농장주의 비위를 맞추는 성직자들, 그 제도로 지배를 하고 싶어하는 정치가들. 이런 사람들은 자신들의 교묘한 재주를 발휘하여, 세계를 놀라게 할 정도로 언어와 윤리를 뒤틀고 구부립니다. 그들은 자연과 성경과 그 밖의 것들을 자기들 목적에 맞게 왜곡합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 자신도 세상 사람들도 그런 그들의 말을 믿지 않습니다.”

노예제도 뿐 아니라 노예제도 주변부의 인물들도 요즘과 비슷한가 보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말도 되지 않는 억지를 부린다. 요즘도 이런 인물들이 숱하게 보인다. 고전이라고 하는 것은 오래 오래 살아남아서, 그 때의 시대상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보고 있으면, 지금도 여전히 그런 인간상들이 존재하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인문적 교양의 대명사가 고전소설이 된 것이 아니겠는가?

노예제도에 대해 직설적으로 말하는 부분이다. 아래를 읽어보자.

“흑인은 무지하고 나약한데, 나는 지식이 있고, 강하기 때문에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알고 또 그렇게 할 수 있기 때문에 나는 흑인이 가진 모든 것을 빼앗아 독차지 하고 내 기분만큼만 그에게 줍니다. 내게 너무 힘들고 너무 지저분하고 너무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은 무엇이던지 흑인에게 주어 그것을 하도록 시킵니다. 내가 일하는 것을 싫어하니까 흑인에게 시키는거죠. 햇빛에 내 피부를 거을리는게 싫어서 흑인에게 나 대신 태양아래 서있게 합니다. 그가 돈을 벌어 오지만 내가 그것을 쓰죠. 웅덩이가 나타날 때마다 그가 그 위를 엎드리고 나는 그 등을 밟고 가기 때문에 구두를 적시지 않고 건너갈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의지가 아닌 내 의지를 따릅니다. 그의 생애 내내 말이죠. 그리고 나는 나 좋을대로 이런소리를 지껄이는 겁니다. 흑인, 그동안 너는 내말을 충실히 따랐으니, 이제 천국에 갈 기회를 얻었다.하고 말입니다.”

노예제에 대해 대놓고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가 이글을 적었을 때가 1850년대인데 그때는 영국에서는 산업혁명이 일어난 후 산업 문명으로 나아가는 중이고, 미국은 목화 농장에서 섬유산업의 재료를 제공하고 있었던 때이다. 이 시점 이전에 영국을 보면 산업화가 되면서 관습법에 따라 풀어놓았던 목장의 땅에 말뚝을 박아 농부들이 못들어오게 막았다. 일명, ‘인클로저 법안’들을 의회에 제출하여, 그 땅의 소유권을 주장한 것이다. 농민들은 농촌에서 쫓기듯 도시로 몰려들었다. 영주들은 그 곳에 양을 키워 섬유산업의 재료 중 하나이면서 네덜란드와 덴마크에서 많은 양을 수입하던 양모를 자체 생산한다.

영국의 농민들은 도시로 와서 모두 빈민이 되어 버렸다. 1820년부터 50년까지는 사람목숨이 사람목숨이 아니었다. 평균연령이 30대까지 올라가 있던 그 이전과 다르게 산업혁명 초기에는 평균연령이 17세였다고 한다. 어떠한 지경인지 느낌이 올 것이다. 이때에 등장하는 것이 찰스디킨스의 올리버트위스터와 위대한 유산 등인데, 이런 시대 풍경을 그려놓았다.

1920년대 미국을 배경으로 한 존 스타인백의 소설 ‘분노의 포도’에도 영국과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농장들이 대지주들에게 야금야금 먹혔다. 조그만 농장에서는 농사가 안되면 빚을 내어 먹고 살았다. 그리고 그 빚으로 인해 대농장주들에게 땅을 빼앗겨버린다. 나중에 그곳을 트랙터로 다 밀어버리니 사람들은 그 곳을 떠날 수 밖에 없었다. 그 사람들이 캘리포니아로 이주하면서 일어나는 일을 적은 것이다. 같은 것이다. 읽다 보니 그 글이 적힌 때의 시대상이 그 책을 이해하는데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느낀다.

이왕 나온김에 1830년대 혁명의 소용돌이가 잠시 주저하는 듯 머뭇거리는 프랑스를 가보자, 장발장은 1815년 출소하여 1832년 6월 혁명의 소용돌이 안에 있었다. 유럽의 산업화와 함께 장발장은 영국과 연한 프랑스 도시의 기업가로 다시 등장한다. 그리고 시장이 된다. 그와 함께 혁명과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뭍 시민들은 하층민으로 전락한다. 전반적으로 신흥산업가 계층에게 산업화의 열매는 빨려 들어가고 노동자들은 극도의 빈곤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싼값에 노동력을 제공한다.

그리고 노예제가 생생하게 살아있는 ‘톰아저씨의 오두막’까지 고전이라고 명명된 소설들에는 그 시대상과 그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생생하게 살아있다. 지금 내가 책 속에 빠져서 그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듯하게 느끼고, 그러한 상황에 울분을 터뜨리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본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은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노예제에서 온갖 차별의 병폐를 본다. 우리나라에도 노비가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에게도 노비의 멍에가 지어지듯이, 미국 흑인노예들은 백인주인의 아이를 낳고 그 아이를 노예라고 팔아버리는 그런 상황에 처해 있었다. 부모로서의 의식이 없음은 물론, 자산을 확충하는 방법으로까지 전락해버린 것이다. 모든 백인들이 그랬다는 것은 아니다. 일부에서 일어난 일이겠지만, 엄연히 기록상으로 남아있다. 이 책을 읽으며 분노하는 부분 중 하나다. 저자는 마치 대자보를 적듯이 마지막 부분을 정리하고 있다. 정의로운 미국시민들이여 제발, 노예제도를 폐지하자! 하고 말이다. 이 책이 발표되고 몇 년후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되고, 노예제도 폐지를 선언한다.

그는 이 책의 소재가 된 인물들을 현실에서 만나고 주변 지인들이 직접 본 이야기들로 구성했다고 한다. 끔찍한 현실에 눈둘 곳을 못찾겠다. 하지만, 기껏 200년도 지나지 않은 이야기이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는 그러한 차별적 상황에 지속적으로 노출되어 있다.

우리 스스로 노예로 전락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러한 차별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곰곰 생각해 보아야 한다.